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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브루크너, 교향곡 제3번 - 바그너 교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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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크너의 '교향곡 제3번'은 1873년 처음 완성이 되고 부제를 '바그너 교향곡'이라고 붙입니다.

1877년 초연은 대실패였고 이후 어떤 음악가에게는 영감이 되고 어떤 음악가들에게는 비판과 멸시의 교향곡이 됩니다.

그리고 초연 실패 후 수정 작업을 많이 거치게 되는데 브루크너는 교향곡 중 '가장 많이 수정된 교향곡'이라고 말합니다.

브루크너

***브루크너와 말러***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3번'은 1877년 자신이 직접 지휘로 초연이 이루어졌지만 결과는 처참한 실패였습니다.

한 악장이 마칠 때마다 객석은 비워졌고 연주가 끝났을 때에는 20여 명의 관객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고작 20명의 관객 중에는 17세의 구스타프 말러도 있었습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3번'은 실패를 했지만 말러에게는 미래의 교향곡 작곡가가 되기 위한 발판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말러는 교향곡 3번에서 영감을 받아 '네 손을 위한 피아노 곡'으로 편곡을 해 출판을 합니다.

브루크너는 말러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교향곡 제3번' 총보를 선물하며 서로 좋은 음악 친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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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제3번에 대한 비판***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3번'에 대한 반응은 대체적으로 비판적이었습니다.

여러 이유 중 평론가들이 핵심적으로 말하는 것인 바그너풍의 악상이 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베토벤의 제 9번 합창에서 바그너의 발키레와 만났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들의 발굽 아래 짓밟혔다'라고 평을 할 만큼 브루크너의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었고 실제 바그너의 로엔그린, 탄호이저,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바그너

그리고 또 다른 논쟁에는 당시 음악적인 상황입니다.

당시 빈의 음악계는보수주의 음악의 브람스, 한슬리크와 진보주의를 강조하는 바그너, 리스트로 양분화되어 있었습니다.

브루크너는 바그너 숭배자였고 '교향곡 제3번'에 '존경하는 바그너에게'라는 헌정사와 '바그너 교향곡'이라는 부제까지 넣어 원색적으로 바그너 예찬했습니다.

이것을 보수주의 음악가들이나 바그너 반대파들은 부르크너의 음악을 너그럽게 볼 이유가 없었고 다양한 비평과 악평을 쏟아냅니다.

 

브루크너는 초연의 실패로 주변의 싸늘한 반응에 자신감을 상실합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통해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쳤고 바그너의 음악이 연상되는 부분과 블럭같이 따로 떨어진 듯한 선율들을 부드럽게 다듬어줍니다.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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